발로 땅을 차며 달리던 나무 기계에서, 6.8kg의 카본 레이서와 모터가 페달을 거드는 전기자전거까지. 화산 폭발과 말의 부족, 여성 해방과 산악 내리막 경주가 빚어낸 두 바퀴의 200년을 따라가 봅니다.
읽는 시간 약 25분인터랙티브 4개연표 28개 이정표
들어가며: 가장 효율적인 기계
자전거는 인간이 만든 이동 수단 가운데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기계로 자주 꼽힙니다. 같은 거리를 이동할 때 사람이 걷는 것보다 훨씬 적은 힘으로 몇 배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연료도 배기가스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해 보이는 기계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놀랄 만큼 긴 시행착오가 필요했습니다. 바퀴와 체인, 베어링과 공기 타이어는 각각 다른 시대, 다른 사람의 손에서 태어났고, 그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진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1817년 독일 만하임의 흙길에서 시작해 오늘날 서울의 공공자전거 거치대에 이르기까지, 자전거가 걸어온 길을 시대순으로 짚어 봅니다. 단순히 연도와 발명가의 이름을 나열하기보다, 왜 그때 그런 모양이 나타났는지를 함께 살피려 합니다. 페니파딩의 앞바퀴가 사람 키만큼 커진 데에는 분명한 공학적 이유가 있었고, 투르 드 프랑스가 오랫동안 변속기를 금지한 데에도 나름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기술과 사회, 스포츠와 산업이 서로 얽히며 만든 200년의 이야기를 아래의 인터랙티브 연표로 먼저 훑어본 뒤, 본문에서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Interactive 01
인터랙티브 연표: 28개의 이정표
시대 칩으로 걸러 보고, 연도 카드를 눌러 자세한 설명을 확인하세요. 카드에 포커스를 두고 ←→ 키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1817
드라이지네 첫 주행
연표를 불러오는 중입니다. 자바스크립트가 꺼져 있다면 아래 본문에서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전거? 스케치 논쟁
자전거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모은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의 한 장 뒷면에, 체인으로 뒷바퀴를 굴리는 오늘날의 자전거와 놀랍도록 닮은 스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1960년대 수도원에서 진행된 원고 복원 작업 중에 드러났다고 알려졌고, 1974년 이탈리아 학자 아우구스토 마리노니가 이를 공개하면서 "자전거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구상되었다"는 이야기가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다빈치의 제자 살라이가 스승의 아이디어를 베껴 그렸다는 해석까지 덧붙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은 이 스케치를 후대에 덧그려진 위작으로 봅니다. 독일의 기술사학자 한스-에르하르트 레싱 등은 복원 이전에 촬영된 같은 페이지의 사진에서는 해당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원래 있던 원과 선 몇 개 위에 누군가 자전거 형태를 덧그린 흔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림 속 자전거는 300여 년 뒤에야 등장하는 체인 구동과 조향 가능한 앞바퀴를 너무나 완성된 형태로 담고 있습니다. 실제 자전거 발명의 역사는 이후에 보듯 수많은 실패와 단계적 개량의 연속이었는데,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뛴 듯한 그림이라는 점이 오히려 의심을 키웁니다.
신중하게 읽기다빈치 스케치의 진위는 지금도 완전히 결론이 난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학계의 주류 견해는 "복원 과정 전후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며, 자전거 발명의 증거로 삼기 어렵다"는 쪽입니다. 따라서 자전거의 역사는 실물과 기록이 분명한 1817년의 드라이지네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817년, 카를 드라이스의 '달리는 기계'
1817년 6월 12일, 독일 바덴 대공국의 산림 관리관이자 발명가였던 카를 폰 드라이스(Karl von Drais)는 만하임 시내에서 이상한 기계를 끌고 나왔습니다. 나무로 된 두 바퀴를 앞뒤 일직선으로 세우고 그 위에 들보와 안장을 얹은 장치였습니다. 그는 안장에 걸터앉아 두 발로 땅을 번갈아 차며 나아갔고, 인근의 역참까지 약 13km 남짓을 한 시간 정도 만에 왕복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마차가 다니던 속도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기록이었습니다. 드라이스는 이 기계를 '라우프마시네(Laufmaschine)', 즉 '달리는 기계'라고 불렀고, 프랑스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 '드라이지엔', 영어권에서는 '드라이지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페달도 체인도 없는 이 장치가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두 바퀴를 일렬로 놓고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지 상태에서는 쓰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일정 속도 이상으로 움직이면 앞바퀴를 살짝 틀어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페달 없는 '밸런스 바이크'로 자전거를 배우는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드라이스는 앞바퀴를 조향할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달았고, 팔을 받칠 수 있는 받침대까지 설치했습니다. 무게는 약 20kg 안팎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탐보라 화산과 '여름이 없던 해'
흥미로운 것은 드라이지네가 등장한 시대 배경입니다. 1815년 4월, 지금의 인도네시아 숨바와섬에 있는 탐보라 화산이 기록된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분화했습니다. 성층권까지 치솟은 화산재와 황산 에어로졸이 햇빛을 가리면서 이듬해인 1816년 유럽과 북미는 '여름이 없던 해'를 겪었습니다. 6월에 눈이 내리고 곡물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고, 귀리 값이 치솟으면서 말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굶주리거나 도축되는 말이 늘어나자 말을 대신할 이동 수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기후 재난이 드라이스로 하여금 '말 없이 달리는 기계'를 구상하게 한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봅니다. 물론 드라이스가 이전부터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것을 연구해 왔다는 점에서, 화산이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의 부족이라는 사회적 문제가 이 발명이 주목받는 데 좋은 토양이 되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드라이지네는 한때 유럽 각지에서 유행했지만, 울퉁불퉁한 길을 피해 보도로 달리던 탑승자들이 보행자와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면서 여러 도시가 통행을 금지했고, 열기는 몇 년 만에 식어 버렸습니다.
1860년대, 페달의 등장과 '본셰이커'
드라이지네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바퀴 탈것은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습니다.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은 18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였습니다. 마차 부품을 만들던 피에르 미쇼(Pierre Michaux)와 그의 아들 에르네스트의 공방은 앞바퀴 축에 직접 크랭크와 페달을 단 '벨로시페드(vélocipède)'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발을 땅에서 떼고도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 출신 기계공 피에르 랄르망은 1866년 미국에서 페달 구동 장치로 특허를 받았는데, 페달이라는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떠올렸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미쇼의 벨로시페드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무렵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1868~1869년에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벨로시페드 열풍'이 불었습니다. 실내 승마장을 개조한 자전거 교습소가 생기고 첫 공식 경주가 열린 것도 이 무렵입니다. 하지만 이 기계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연철 프레임에 나무 바퀴, 그리고 그 바깥에 두른 쇠 테가 자갈 깔린 도로의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했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이 기계에 '뼈를 흔드는 것', 즉 본셰이커(boneshaker)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무게는 30kg을 훌쩍 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면서 프랑스의 자전거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주도권은 재봉틀과 정밀 기계 산업이 발달한 영국 코번트리 지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자전거 기술 혁신의 상당 부분이 영국에서 이루어진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1870년대, 하이휠과 '페니파딩'
본셰이커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페달이 앞바퀴 축에 직접 붙어 있으므로 페달을 한 바퀴 돌리면 앞바퀴도 정확히 한 바퀴만 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페달을 돌릴 수 있는 회전수는 한정되어 있으니, 더 빨리 달리려면 바퀴 한 바퀴의 둘레, 즉 바퀴의 지름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름 1m 바퀴는 한 바퀴에 약 3.1m를 가지만, 지름 1.5m 바퀴는 약 4.7m를 갑니다. 같은 페달링으로 50%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앞바퀴는 점점 커졌고, 결국 탑승자의 다리 길이가 허락하는 한 가장 큰 바퀴를 고르는 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경주용 앞바퀴는 지름이 1.5m를 넘기도 했습니다. 1870년 영국의 제임스 스탈리와 윌리엄 힐먼이 내놓은 '아리엘(Ariel)'은 가는 철사 스포크로 바퀴를 당겨 지탱하는 장력 바퀴와 속이 빈 강철관 프레임을 써서, 거대한 앞바퀴를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하이휠 자전거를 당시에는 '평범한 자전거'라는 뜻의 오디너리(ordinary)라 불렀습니다. 큰 페니 동전과 작은 파딩 동전을 나란히 놓은 모습 같다는 '페니파딩'이라는 이름은, 이 형식이 구식이 되어 가던 19세기 말 무렵에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휠은 빠르고 우아했습니다. 1882년 영국의 허버트 코티스는 하이휠로 한 시간에 20마일(약 32km)을 넘게 달리는 기록을 세웠고, 1884년부터 1886년까지 토머스 스티븐스는 하이휠을 타고 세계 일주를 해냈습니다. 그러나 대가도 컸습니다. 탑승자가 앞바퀴 거의 바로 위, 지상 1.5m 높이에 앉기 때문에 돌부리 하나에도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 머리부터 떨어지는 사고가 잦았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헤더(header)'라 불렀습니다. 올라타고 내리는 것부터 기술이 필요했으니, 하이휠은 결국 용감하고 체력 좋은 젊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남았습니다.
기어 인치의 기원오늘날에도 자전거 기어비를 '기어 인치(gear inch)'로 표현하곤 합니다. 이는 "이 기어 조합은 지름 몇 인치짜리 하이휠 앞바퀴와 같다"는 뜻으로, 페니파딩 시대의 감각이 단위로 남은 흔적입니다. 기어비 계산은 07 계산기 장에서 직접 해 볼 수 있습니다.
Interactive 02
진화 슬라이더: 1817 → 2025
슬라이더를 움직이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자전거와 무게, 속도가 바뀝니다. 여덟 대 모두 실제 치수를 같은 축척으로 그렸으니 크기 변화도 그대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가로선 0.5m 간격). 아래 연도 칩을 눌러 바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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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817년 드라이스 '라우프마시네' — 나무 바퀴 지름 약 70cm, 전체 길이 약 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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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드라이지네
대표 무게약 22kg
일반 주행 속도약 12~15km/h
1885년, 스타리 로버와 '세이프티 바이시클'
하이휠의 위험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역사를 바꾼 답은 체인이었습니다. 페달과 바퀴를 직접 연결하지 않고, 크랭크 축의 큰 톱니(체인링)와 뒷바퀴의 작은 톱니(스프로킷)를 체인으로 이으면 페달 한 바퀴에 뒷바퀴를 두세 바퀴 돌릴 수 있습니다. 바퀴를 키우지 않고도 톱니 수의 비율, 즉 기어비로 속도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해리 로슨은 1879년 무렵 이미 뒷바퀴를 체인으로 구동하는 '바이시클레트'를 선보였지만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결정타를 날린 사람은 하이휠 '아리엘'을 만든 제임스 스탈리의 조카, 존 켐프 스탈리(John Kemp Starley)였습니다. 그가 1885년 코번트리에서 발표한 로버(Rover)는 앞뒤 바퀴 크기가 비슷하고, 안장이 두 바퀴 사이에 낮게 놓였으며, 체인으로 뒷바퀴를 구동했습니다. 탑승자의 발이 땅에 쉽게 닿고 무게 중심이 낮아 앞으로 고꾸라질 걱정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형식을 하이휠과 구분해 '안전한 자전거', 곧 세이프티 바이시클(safety bicycle)이라 불렀습니다. 로버는 이후 몇 년 사이 개량을 거듭하며 앞바퀴 포크를 기울여 조향 안정성을 높였고, 두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다이아몬드 프레임으로 수렴해 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구조가 14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판매되는 로드 바이크, 하이브리드, 마운틴바이크의 대다수는 여전히 두 개의 삼각형 프레임, 비슷한 크기의 두 바퀴, 뒷바퀴 체인 구동이라는 로버의 기본 설계를 따릅니다. 소재와 부품은 끝없이 바뀌었지만, 자전거의 '골격'은 1880년대 말에 사실상 완성된 셈입니다. 덧붙여 로버라는 이름을 단 이 회사는 훗날 자동차 회사로 변신해 영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1888년, 던롭의 공기 타이어
세이프티 바이시클이 등장한 직후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작아진 바퀴는 하이휠보다 노면 충격을 더 크게 받았고, 당시 쓰이던 통고무 타이어는 그 충격을 거의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자전거 업계 사람이 아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수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이 세발자전거를 탈 때 덜컹거림 때문에 두통을 호소하자, 고무 튜브에 공기를 넣어 바퀴에 감싸는 방법을 고안했고 1888년 특허를 받았습니다.
사실 공기 타이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윌리엄 톰슨이 1840년대에 이미 특허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활용할 만한 탈것이 없었고 아이디어는 잊혀졌습니다. 던롭의 타이어는 자전거 붐과 정확히 맞물렸습니다. 1889년 공기 타이어를 단 자전거가 통고무 타이어를 단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경주 결과가 나오자 업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1891년에는 프랑스의 미쉐린 형제가 펑크 수리를 쉽게 하도록 타이어를 림에서 떼어 낼 수 있는 탈착식 구조를 내놓았습니다. 승차감과 속도, 수리 편의성까지 갖춘 공기 타이어는 세이프티 바이시클을 완성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으며, 머지않아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1890년대 자전거 붐과 여성 해방
체인 구동의 세이프티 프레임과 공기 타이어가 결합하자, 자전거는 더 이상 용감한 젊은이들의 위험한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1890년대 유럽과 미국에는 유례없는 자전거 붐이 일었습니다. 공장들은 대량 생산 기법을 앞다투어 도입했고 가격은 빠르게 내려갔습니다. 자전거 동호회는 더 나은 도로를 요구하는 '좋은 도로 운동(Good Roads Movement)'을 이끌었는데, 이렇게 닦인 포장도로는 몇 년 뒤 자동차가 달리는 길이 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기 전 자전거 가게를 운영했고, 푸조·오펠·로버 같은 여러 자동차 회사가 자전거 제조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자전거가 근대 기계 산업의 학교였음을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 극적인 변화는 여성들의 삶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중산층 여성들은 코르셋과 바닥까지 끌리는 긴 치마에 묶여 있었고, 보호자 없이 먼 곳을 다니는 것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습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처음으로 스스로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 여성들은 무릎 아래를 묶은 헐렁한 바지, 이른바 블루머(bloomers)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185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보급에 앞장서 그 이름이 붙은 이 옷은 처음에는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자전거 붐과 함께 '합리적 복장(rational dress)'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전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드리지요. 저는 자전거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여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자유와 자립의 감정을 줍니다.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멈춰 서서 기뻐합니다."
— 수전 B. 앤서니, 1896년 넬리 블라이와의 인터뷰 (뉴욕 월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 수전 B. 앤서니의 이 말은 자전거가 단순한 탈것을 넘어 사회 변화의 도구였음을 보여 주는 가장 유명한 증언입니다. 1894년에는 애니 런던데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이 자전거 세계 일주에 나섰고, 금주 운동가 프랜시스 윌라드는 50대에 자전거를 배운 경험을 책으로 펴내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물론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품위 없다'고 비난하는 목소리, 여성의 건강을 해친다는 근거 없는 의학적 경고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페달을 밟는 여성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고, 이는 20세기 여성 참정권 확대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Infographic
무게로 보는 200년
단위: kg (대표값·추정치)
드라이지네1817
~22
본셰이커1860년대
30+
페니파딩1870~80년대
16~23
세이프티1885~1890년대
~16
강철 로드1970년대
~10
카본 로드오늘날 (UCI 하한)
6.8
전기자전거오늘날 (참고)
20~25
막대 길이는 32kg을 100%로 한 상대값입니다. 범위로 표기된 항목은 범위의 중간값 근처로 그렸습니다. 같은 시대에도 제작자와 용도에 따라 무게 차이가 큽니다.
0억 대+
전 세계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자전거 수 (여러 추정치 기준)
0kg
UCI 공인 경기용 자전거 최소 중량
0km
UCI 아워 레코드 — 필리포 가나, 2022년
0km
1903년 제1회 투르 드 프랑스 총 거리 (6개 구간)
변속기의 역사: 바퀴를 뒤집던 시대에서 캄파뇰로까지
세이프티 바이시클이 체인을 도입하면서 '기어비'라는 개념이 생겼지만, 초기 자전거는 하나의 기어비만 가진 싱글 기어였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는 가벼운 기어가, 평지에서는 무거운 기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지만, 달리는 도중 기어를 바꾸는 장치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 경주 선수들은 뒷바퀴 양쪽에 크기가 다른 톱니를 하나씩 달아 두었다가, 언덕 앞에서 내려 바퀴를 뒤집어 끼우는 방식으로 기어를 바꿨습니다.
프랑스의 자전거 여행가 폴 드 비비(필명 벨로시오)는 1900년대 초부터 다단 변속의 필요성을 열심히 주장했습니다. 반면 투르 드 프랑스를 창설한 앙리 데그랑주는 변속기가 선수의 순수한 근력 대결을 해친다고 보아 오랫동안 경기에서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고, "변속기는 마흔다섯 넘은 사람에게나 어울린다"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집니다. 투르 드 프랑스가 디레일러(외장 변속기)를 공식 허용한 것은 1937년이 되어서였습니다.
변속기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름은 이탈리아의 툴리오 캄파뇰로(Tullio Campagnolo)입니다. 아마추어 선수였던 그는 1920년대 후반 추운 산악 경주 도중, 얼어붙은 손으로 바퀴의 나비 너트를 풀지 못해 기어를 바꾸지 못하고 경기를 망쳤다고 전해집니다. 이 경험에서 출발해 그는 레버 하나로 바퀴를 고정하고 푸는 퀵릴리스를 고안해 1930년 무렵 특허를 받았고, 이후 변속기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1940년대의 막대식 변속기를 거쳐 1949년 무렵 선보인 그란 스포르트(Gran Sport)는 케이블로 평행사변형 링크를 움직여 체인을 옆 톱니로 옮기는 방식이었는데, 이 원리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외장 변속기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심플렉스와 위레, 이후 일본의 선투어와 시마노도 변속기 혁신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 선투어가 고안한 '경사 평행사변형' 구조는 변속 정확도를 크게 높인 발명으로 평가받습니다.
1903년, 투르 드 프랑스의 탄생
자전거가 대중화되자 자전거 경주는 곧 거대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정점이 바로 투르 드 프랑스입니다. 1903년 프랑스 스포츠 신문 『로토(L'Auto)』는 경쟁지와의 부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프랑스 전역을 도는 전례 없는 장거리 경주를 기획했습니다. 첫 대회는 파리를 출발해 리옹, 마르세유, 툴루즈, 보르도, 낭트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6개 구간, 총 약 2,428km 코스였습니다. 한 구간이 400km를 넘어 밤새 달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비 도움 없이 선수 스스로 고장을 고쳐야 했습니다. 초대 우승자는 굴뚝 청소부 출신으로 알려진 모리스 가랭이었습니다.
대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신문 판매량은 급증했고, 이후 투르는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열리며 세계 최고 권위의 자전거 경주로 자리 잡았습니다. 종합 선두를 상징하는 노란색 저지(마요 존)는 1919년에 도입되었는데, 『로토』가 노란 종이에 인쇄되었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자전거 기술의 시험장 역할도 했습니다. 변속기, 경량 소재, 클릿 페달, 에어로 설계, 전자식 변속 등 오늘날 자전거의 거의 모든 혁신이 이 무대에서 검증되거나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자전거 역사
자전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0년대 무렵 서재필, 윤치호 같은 개화기 인물들이 자전거를 탔다는 기록과 일화가 전해지며, 당시에는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라는 뜻의 자전차(自轉車) 또는 자행거(自行車)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극소수 상류층과 외국인의 신기한 구경거리였지만, 20세기 초에 들어서며 우편 배달과 상점 배달 등 실용적인 용도로 차츰 퍼져 나갔습니다.
엄복동, 식민지 조선의 자전거 영웅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 중심에 엄복동(1892~1951)이 있었습니다. 자전거 상회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1913년 경성에서 열린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일본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여러 대회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에 대한 울분이 쌓여 있던 시절, 조선인이 일본인을 이긴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안이었기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이라는 노랫말이 퍼질 만큼 그는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다만 그의 생애 후반에는 자전거 절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오늘날에는 영웅적 면모와 인간적 한계를 함께 보려는 시각이 많습니다.
삼천리호와 국산 자전거의 시작
해방 이후 한국 자전거 산업의 출발점은 1944년 김철호가 설립한 경성정공입니다. 자전거 부품을 만들던 이 회사는 1952년 이름을 기아산업으로 바꾸고, 같은 해 국내에서 만든 첫 자전거인 '삼천리호'를 생산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탄생한 삼천리호는 국산 기계 공업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기아산업은 이후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고, 자전거 사업은 1979년 별도의 회사로 독립해 오늘날의 삼천리자전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960~1970년대 자전거는 쌀가게와 우체부, 신문 배달원의 짐 자전거로서 산업화 시대의 일상을 실어 날랐습니다.
레저의 시대, 그리고 따릉이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자전거는 생계형 운송 수단에서 레저와 건강, 친환경 교통의 상징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하천을 따라 자전거길이 정비되었고, 2012년에는 인천 아라서해갑문에서 부산 낙동강하굿둑까지 이어지는 약 633km의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개통되어 많은 동호인들의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가 정식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대여하고 아무 대여소에나 반납하는 따릉이는 빠르게 시민의 발로 자리 잡아, 이제는 지하철과 버스 사이를 잇는 '마지막 1km' 교통수단으로 널리 쓰입니다. 2018년에는 페달 보조 방식의 전기자전거가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자전거도로를 달릴 수 있도록 법이 바뀌면서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1970년대, BMX와 마운틴바이크의 탄생
자동차가 교통의 주역이 된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자전거는 주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자전거 역사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캘리포니아 남부의 아이들은 모터크로스 선수들을 흉내 내며 작은 바퀴의 자전거로 흙길 언덕과 점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오토바이 다큐멘터리 영화 『온 애니 선데이』의 오프닝에 아이들이 자전거로 흙길을 달리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이 놀이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고, BMX(Bicycle Motocross)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BMX 레이싱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샌프란시스코 북쪽 마린 카운티에서는 또 다른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젊은 라이더들은 1930~40년대에 만들어진 튼튼하고 무거운 크루저 자전거를 중고로 구해 굵은 타이어와 오토바이용 레버를 달아 개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고물 같은 자전거를 '클렁커(clunker)'라 불렀습니다. 1976년부터 이들은 타말파이어스산의 가파른 비포장 소방도로에서 내리막 기록을 겨루는 경주를 열었는데, 내리막 내내 코스터 브레이크를 잡아 허브 안의 그리스가 타 버리는 바람에 매번 그리스를 다시 채워 넣어야(repack) 했다는 데서 '리팩(Repack) 레이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리팩 레이스에 참가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곧 자전거 산업을 바꿀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레임 빌더 조 브리즈(Joe Breeze)는 1977년 무렵 처음부터 산악 주행을 위해 설계한 새 프레임, 이른바 '브리저(Breezer)'를 제작해 최초의 근대적 마운틴바이크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리팩 최고 기록 보유자로 알려진 게리 피셔(Gary Fisher)는 찰리 켈리와 함께 1979년 '마운틴바이크스(MountainBikes)'라는 회사를 세우고 톰 리치의 프레임으로 자전거를 판매했습니다. 1981년 스페셜라이즈드가 첫 양산형 마운틴바이크 '스텀프점퍼'를 내놓으며 MTB는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고, 1990년 첫 UCI 세계선수권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으로 이어졌습니다. 서스펜션, 디스크 브레이크, 넓은 기어 범위 등 MTB에서 먼저 시도된 기술의 상당수는 이후 다른 자전거로 퍼져 나갔습니다.
소재 혁명: 강철 → 알루미늄 → 카본 → 티타늄
자전거 프레임 소재의 역사는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단단하며, 얼마나 오래가는가'를 둘러싼 끝없는 경쟁이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자전거의 주인공은 단연 강철이었습니다. 1935년 영국 레이놀즈가 내놓은 '531' 튜브처럼 관의 양 끝은 두껍고 가운데는 얇게 만든 '버티드(butted)' 크로몰리 강관은 가볍고 탄력 있는 승차감으로 수십 년간 경주용 자전거의 표준이었습니다. 강철은 튼튼하고 수리가 쉬워 지금도 투어링 자전거와 수제 프레임에서 사랑받습니다.
1970~80년대에는 알루미늄이 도전장을 냈습니다. 알루미늄은 강철보다 밀도가 약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강성이 낮아, 같은 굵기로 만들면 지나치게 휘청거립니다. 미국의 캐논데일 등은 관의 지름을 크게 키운 '오버사이즈' 튜브로 이 문제를 해결했고, 1990년대에는 알루미늄 프레임이 대중화되었습니다. 가볍고 저렴한 알루미늄은 지금도 입문용 자전거의 주력 소재입니다.
진짜 혁명은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카본)이었습니다. 탄소섬유를 수지로 굳힌 카본은 섬유의 방향과 겹수를 조절해 원하는 부위는 단단하게, 원하는 부위는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독보적인 장점이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카본 프레임이 그랜드 투어에서 우승을 거두며 주목받았고, 1990년대 일체형(모노코크) 성형 기술이 발전하면서 2000년대 이후 프로 경기는 사실상 카본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UCI는 경기용 자전거의 최소 중량을 6.8kg으로 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티타늄은 1970년대부터 시도되어 1980~90년대에 본격적으로 쓰였습니다. 녹슬지 않고 피로에 강하며 특유의 부드러운 승차감이 있어 '평생 타는 프레임'으로 불리지만, 가공이 까다로워 값이 비쌉니다.
자전거 프레임 소재 비교
소재
밀도(g/cm³)
본격 사용
특징
강철(크로몰리)
약 7.8
1880년대~
튼튼하고 수리 쉬움, 탄력 있는 승차감, 상대적으로 무거움
알루미늄 합금
약 2.7
1980~90년대~
가볍고 저렴, 굵은 튜브로 강성 확보, 피로 수명 고려 필요
티타늄 합금
약 4.4~4.5
1980~90년대~
부식에 강하고 내구성 우수, 부드러운 승차감, 고가
카본(CFRP)
약 1.5~1.6
1990~2000년대~
가장 가볍고 설계 자유도 높음, 충격 손상 점검 필요
Infographic
자전거를 바꾼 10가지 핵심 혁신
1817
두 바퀴 균형
일렬 두 바퀴로 달리며 조향으로 균형을 잡는 원리.
1860s
크랭크·페달
발을 떼고도 계속 나아가는 회전 구동의 시작.
1870
철사 스포크 바퀴
가는 스포크의 장력으로 가볍고 튼튼한 바퀴 구현.
1885
체인 구동
기어비로 속도를 얻어 바퀴 크기를 줄인 세이프티의 핵심.
1888
공기 타이어
던롭의 발명. 승차감과 속도를 동시에 끌어올림.
1930
퀵릴리스
캄파뇰로의 레버식 바퀴 고정. 공구 없이 바퀴 탈착.
1949
평행사변형 변속기
케이블로 체인을 옆 톱니로 옮기는 외장 변속의 원형.
1984
인덱스 변속
시마노 SIS. '딸깍' 한 칸씩 정확히 맞는 변속.
1984
클릿 페달
신발과 페달을 결합해 당기는 힘까지 활용.
2009
전자식 변속
모터가 변속기를 움직이는 시마노 Di2, 이후 무선 eTap.
1984년, 인덱스 변속(SIS)과 클릿 페달
캄파뇰로 이후 수십 년 동안 변속기는 '마찰식'이었습니다. 레버를 원하는 만큼 당기면 그만큼 변속기가 움직이는 방식이라, 체인이 정확히 다음 톱니에 올라탈 때까지 귀로 소리를 들으며 레버 위치를 미세하게 맞춰야 했습니다. 숙련자에게는 문제가 없었지만 초보자에게는 어렵고, 오르막에서 힘껏 페달을 밟는 중이라면 숙련자라도 실수가 잦았습니다.
1984년 일본의 시마노는 듀라에이스 그룹세트에 SIS(Shimano Index System)를 도입했습니다. 레버에 단계별 홈을 만들어 '딸깍' 하고 한 칸씩 걸리도록 했고, 이에 맞춰 케이블, 변속기, 스프로킷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했습니다. 레버를 한 칸 움직이면 체인이 정확히 한 단 옮겨 가는 인덱스 변속은 곧 업계 표준이 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브레이크 레버와 변속 레버를 하나로 합친 STI가 등장해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도 변속할 수 있게 되었고, 캄파뇰로도 1990년대 초 '에르고파워'로 응수했습니다.
같은 해인 1984년, 프랑스의 스키 장비 회사 룩(LOOK)은 스키 바인딩 원리를 응용한 클릿 페달을 선보였습니다. 그 전까지 선수들은 페달에 토클립과 가죽 끈을 달고 신발 밑창의 홈을 페달에 끼워 발을 고정했는데, 끈을 단단히 조이면 넘어질 때 발을 빼기 어려웠습니다. 룩의 페달은 신발 밑창의 클릿을 페달에 '딸깍' 끼우고, 발뒤꿈치를 바깥으로 비틀면 쉽게 빠지는 구조였습니다. 1985년 베르나르 이노가 이 페달로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면서 클릿 페달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흔히 '클립리스' 페달이라고 부르는데, 토클립이 없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입니다. 1990년에는 시마노가 걷기 편한 MTB용 SPD 페달을 내놓았습니다.
전자식 변속: Di2와 eTap
인덱스 변속 이후에도 케이블 변속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케이블은 시간이 지나면 늘어나고, 외피 속에 먼지와 녹이 끼면 변속이 둔해졌습니다. 1990년대 마빅 등이 전자식 변속기를 시도했지만, 배터리와 방수, 신뢰성 문제로 널리 쓰이지 못했습니다. 상황을 바꾼 것은 2009년 시마노가 시판한 듀라에이스 Di2였습니다. 레버의 버튼을 누르면 전기 신호가 전선을 타고 변속기 안의 작은 모터에 전달되어 체인을 정확한 위치로 옮깁니다. 케이블 장력 조절이 필요 없고, 수천 번을 변속해도 첫날처럼 정확했습니다.
2015년에는 미국의 스램(SRAM)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버와 변속기를 전선 없이 무선으로 연결한 레드 eTap을 발표했습니다. 캄파뇰로 역시 2010년대 초 EPS라는 전자식 시스템을 선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최고급 경기용 부품에만 쓰였던 전자식 변속은 점차 중급 그룹세트로 내려왔고, 오늘날에는 앱으로 변속 버튼의 기능을 바꾸거나 배터리 잔량을 확인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디스크 브레이크와 튜브리스 타이어
오랫동안 자전거 브레이크는 바퀴의 림(테두리)을 고무 패드로 잡는 림 브레이크가 주류였습니다. 구조가 단순하고 가볍지만, 비가 오면 제동력이 크게 떨어지고 긴 내리막에서는 림이 과열될 수 있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마운틴바이크에서 먼저 자리 잡은 디스크 브레이크는 바퀴 중심에 따로 붙인 금속 원판(로터)을 캘리퍼로 잡는 방식으로, 날씨와 관계없이 안정적인 제동력을 제공합니다. 특히 유압식 디스크는 적은 힘으로도 강하고 섬세하게 제동할 수 있습니다.
로드 바이크에서는 무게 증가와 날카로운 로터로 인한 안전 우려 때문에 도입이 늦었습니다. UCI는 2015년부터 시범 운영을 거쳐 2018년 시즌부터 프로 로드 경기에서 디스크 브레이크를 본격 허용했고,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대부분의 프로팀과 신형 로드 바이크가 디스크 브레이크로 전환했습니다. 디스크 브레이크는 림 브레이크의 간격 제약에서 프레임을 해방시켜, 더 넓은 타이어를 끼울 수 있게 만드는 부수 효과도 낳았습니다.
튜브리스 타이어도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1999년 마빅, 미쉐린, 허친슨이 MTB용 UST 규격을 내놓은 것이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자동차 타이어처럼 내부 튜브 없이 타이어와 림이 직접 공기를 밀봉합니다. 안에 넣은 실런트가 작은 구멍을 스스로 막아 주고, 튜브가 림에 끼어 터지는 '스네이크 바이트' 펑크도 사라집니다. 낮은 공기압으로도 탈 수 있어 접지력과 승차감이 좋아지기 때문에, 오늘날 MTB에서는 사실상 표준이 되었고 로드와 그래블 자전거로도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한때 '좁고 딱딱할수록 빠르다'던 상식이 뒤집히고, 적당히 넓은 타이어가 실제 도로에서 더 빠를 수 있다는 연구가 받아들여진 것도 최근 20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전기자전거 시대
전기 모터를 단 자전거의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1895년 미국의 오그던 볼턴 주니어가 뒷바퀴 허브에 모터를 넣은 전기자전거로 특허를 받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무겁고 용량이 작은 납축전지로는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전환점은 1993년 일본 야마하가 내놓은 PAS(Power Assist System)였습니다. 스로틀로 모터만 돌리는 방식이 아니라, 페달을 밟는 힘을 센서로 감지해 그에 비례해 모터가 힘을 보태는 '페달 보조'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이 페달을 멈추면 모터도 멈추니, 자전거의 본질은 지키면서 오르막과 맞바람의 부담만 덜어 준 셈입니다.
2000년대 이후 가볍고 용량 큰 리튬이온 배터리가 보급되고, 2010년 전후로 크랭크 축에 모터를 넣는 미드 드라이브 시스템이 확산되면서 전기자전거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럽연합은 모터 정격 출력 250W, 보조 속도 시속 25km 이하인 페달 보조형을 일반 자전거와 같은 범주로 다루며 시장의 틀을 잡았습니다. 한국에서도 2018년 3월부터 페달 보조 방식으로 시속 25km 이상에서는 모터가 멈추고 전체 중량이 30kg 미만인 전기자전거는 자전거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전기자전거는 출퇴근용 시티 바이크부터 짐을 싣는 카고 바이크, 험로를 오르는 e-MTB까지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었습니다. 자세한 구조와 법규는 06 전기자전거 장에서 다룹니다.
자전거의 미래
200년 동안 자전거는 놀랄 만큼 많이 바뀌었지만, 동시에 놀랄 만큼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다리 힘을 두 바퀴의 회전으로 바꾸는 원리, 다이아몬드 프레임과 체인이라는 골격은 1885년의 로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변화도 그 골격을 버리기보다는 그 위에 새로운 층을 쌓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큽니다.
가까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흐름은 이미 여럿입니다. 전기자전거에는 미끄러짐을 막는 ABS와 자동 변속, 도난 추적 기능이 들어가고 있으며, 3D 프린팅으로 티타늄이나 카본 부품을 개인 맞춤형으로 제작하는 시도도 늘고 있습니다. 공기를 넣지 않아도 되는 무공기 타이어, 레이더로 뒤에서 다가오는 차량을 알려 주는 후미등, 충돌을 감지해 구조 요청을 보내는 스마트 헬멧도 상용화되었습니다. 도시 차원에서는 탄소 중립과 교통 혼잡 해소를 위해 자전거 전용도로와 공공자전거 시스템을 확충하는 도시가 늘고 있습니다.
결국 자전거의 미래는 기술만큼이나 도시와 사회가 자전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1890년대의 자전거가 여성에게 자유를, 도로에 포장을 가져다주었듯, 21세기의 자전거는 기후 위기와 건강, 도시 공간의 재편이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화산 폭발로 말이 사라진 시대에 태어난 이 기계가, 이제는 화석 연료 이후의 이동 방식을 고민하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긴 진화가 낳은 오늘날의 다양한 자전거 종류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Interactive 03
역사 퀴즈: 얼마나 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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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자전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무엇을 '자전거'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집니다. 두 바퀴를 일렬로 놓고 사람이 올라타 균형을 잡으며 달리는 탈것을 기준으로 하면, 1817년 독일의 카를 폰 드라이스가 만든 드라이지네가 실물과 기록이 확실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페달로 구동하는 자전거는 1860년대 프랑스의 미쇼 공방과 피에르 랄르망 등이, 오늘날과 같은 체인 구동 형식은 1885년 영국의 존 켐프 스탈리가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전거를 설계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다빈치의 노트 모음집에서 자전거 스케치가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1970년대에 나왔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이 그림이 1960년대 원고 복원 과정 전후에 누군가 덧그린 위작이라고 봅니다. 복원 이전 사진에는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지나치게 완성된 형태라는 점이 주요 근거입니다. 따라서 다빈치를 자전거 발명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페니파딩'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큰 앞바퀴와 작은 뒷바퀴의 모습이 영국의 큰 동전인 '페니'와 작은 동전인 '파딩'을 나란히 놓은 것과 닮았다는 데서 붙은 별명입니다. 당대에는 주로 '오디너리(ordinary)'나 '하이휠'이라고 불렀고, 페니파딩이라는 이름은 이 형식이 구식이 되어 가던 19세기 말 무렵에 널리 쓰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전거'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했나요?
'스스로(自) 굴러가는(轉) 수레(車)'라는 뜻의 한자어입니다. 개화기에는 '자전차'와 '자행거' 같은 이름이 함께 쓰였는데, 일본에서 쓰이던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자전거'라는 표기가 표준어로 정착했습니다. 영어 'bicycle'은 '두 개(bi)의 바퀴(cycle)'라는 뜻으로, 1860년대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 경기용 자전거에 6.8kg 최소 중량 제한이 있는 이유는?
국제사이클연맹(UCI)은 2000년 무렵 경기용 자전거의 최소 중량을 6.8kg으로 정했습니다. 지나친 경량화 경쟁이 부품 파손과 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재정이 넉넉한 팀만 유리해지는 장비 경쟁을 제한하려는 취지입니다. 오늘날 기술로는 이보다 훨씬 가벼운 자전거도 만들 수 있어, 일부 선수들은 기준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무게를 더하기도 합니다. 이 규정을 완화하거나 바꾸자는 논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워 레코드란 무엇이고, 현재 기록은 얼마인가요?
아워 레코드는 실내 벨로드롬에서 한 시간 동안 혼자 얼마나 멀리 달릴 수 있는지를 겨루는 기록입니다. 에디 메르크스, 미겔 인두라인, 크리스 보드먼, 브래들리 위긴스 등 시대의 스타들이 도전해 왔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UCI 공인 남자 기록은 이탈리아의 필리포 가나가 2022년 10월 스위스 그렌헨에서 세운 56.792km입니다. 기록은 경신될 수 있으므로 최신 정보는 UCI 발표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 최초의 국산 자전거는 무엇인가요?
1952년 기아산업(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의 후신)이 생산한 '삼천리호'가 최초의 국산 자전거로 기록됩니다. 기아산업은 이후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고, 자전거 부문은 1979년 독립해 오늘날의 삼천리자전거로 이어졌습니다.